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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종교개혁

행복충전중 2012. 5. 8. 00:58

 

 

독일마틴루터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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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자신이 강의하던 비텐베르크대학 정문에 내걸었습니다.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의 건립으로 말미암아 빚에 몰리고 있던 교황 레오 10세는 왕권이 약했던 독일지역에 대대적으로 면죄부 판매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황제부터 파문을 당했으나 독일영방군주의 보호를 받으며 카톨릭교회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이어서 루터는 신과 인간의 보다 직접적이고 내면화된 관계 확립을 위하여 성모숭배와 성인숭배 등을 미신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급기야 미사까지 금하게 됩니다.
그는 만인은 평등하며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취지의 반박문과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대량으로 인쇄하여 대중에게 보급했습니다. 또한 독일 영방군주들은 농민들을 동원하면서 교황 및 황제에 맞서게 되고 이에 따라 독일 전역에는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한 창백한 지식인의 반항이 대중운동으로 확산된 것이지요.

 

(1) 종교개혁의 원인

 

루터의 종교개혁 발발과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종교개혁은 근대유럽사회의 움직임을 보다 역동적으로 반영한 사건이었지요. 그 배경은 먼저 르네상스의 세속적 분위기에 침윤된 교회의 부패상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앞서서 확인하신 바대로 르네상스기의 교황들은 세속적인 통치권력을 추구하고 르네상스의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물질주의 등 세속적 가치를 대변했습니다. 여기에 성직매매, 문란한 사생활, 교회재정의 남용은 기독교 이념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의혹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기원은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고 보다 더 광범위한 기반에서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선 중세이래 지속되어 왔던 민중의 신비주의적인 움직임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교황권의 쇠퇴와 교회의 분열이 심각했던 14세기부터 평신도들은 자발적인 종교모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공동생활 형제단'이라 불리던 이 모임은 제도적인 교회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직접 성령을 체험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선남선녀들로 이루어졌는데요. 이들은 서로 다른 세속의 일에 종사하지만 수입을 공동관리하고, 교육 및 자선에 헌신한다는 단순한 규율로 결합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지식인과 민중들의 움직임이 결합된 현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교사로서도 성공적이었던 형제단은 기독교인문주의의 확산과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와 루터 등과 같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던 겁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대중적인 사회개혁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급진적인 종교개혁의 움직임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잠시 독일 농민전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독일농민전쟁

 

1524년에서 1525년에 걸쳐 독일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은 '평등한 만인'이라는 루터의 가르침에 고무된 농민들의 봉기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집회를 통해서 선출된 성직자들이 순결한 교리를 설교할 것, 군주는 지나친 부역과 세금, 지대를 요구하지 말 것, 농노제를 폐지할 것 등의 12개조를 요구하면서 기존체제의 변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기로에 있던 루터는 구원이 내면적인 것임을 강조하면서 군주와 귀족의 편에 서서 농민봉기의 진압을 촉구했습니다. 결국 1525년 5월, 농민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며, 이후 루터는 독일민중에 대한 종교적 주도권을 상실했습니다.

 

(3) 루터 개혁의 결과 - 정치적 권위주의의 증대

 

1555년 독일 종교분쟁을 타결했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는 루터의 권위주의적인 노선에 따라 종교 선택의 권한, 곧 신앙공동체에 대한 통제권을 세속군주에게 부여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권한을 부여받은 군주의 권력을 강조함으로써 절대주의 체제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후 세속 통치자가 교회 수장을 겸했으며, 성직자들은 국가에 봉사하는 공무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독일 영방군주의 권한은 강화되었고, 독일은 분열 속에서 낙후되었습니다. 루터주의는 북독일지역과 당시 절대주의 체제를 구축해가던 스칸디나비아 등지에 확산되었습니다.

 

(4) 칼뱅의 종교개혁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황과 황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농민을 희생시킴으로써 군주권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절대주의체제와 초기자본주로의 길을 걷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는 종교개혁의 움직임을 더욱 촉진했습니다. 세속군주는 교황의 세력을 배제하고 국가의 종교를 직접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교회의 막대한 토지재산을 통하여 재정을 강화코자 했습니다. 여기에 몰락하던 봉건귀족과 자본투자를 모색하던 자본가들도 가세했지요.
특히 중산층은 종교적 자유를 세금으로부터의 자유. 경제활동과 기술개발 및 이자획득의 자유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중산층의 요구에 보다 접근한 것이 칼뱅의 종교개혁입니다.

 

프랑스 태생의 칼뱅은 카톨릭세력이 견고했던 프랑스에서 추방된 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하고 신정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그는 개인의 구제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펼칩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세속적인 직업활동과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함을 강조했는데요. 이는 근대적인 직업관과 금욕적인 생활윤리를 제공하여 근대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교리는 당시 경제적으로 상승의 길을 걷고 있던 중산층의 호응을 받아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전파됐습니다.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관계는 깊이 검토할 대상입니다. 베버(Max Weber)는 16, 17세기 자본주의 발전의 부분적인 원인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로 설명했다. 칼뱅주의는 새로운 상업문명을 받아들여 부의 축적, 자유방임, 직업소명의식의 근거를 제공했으며,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 등지의 청교도들(Puritans)은 칼뱅의 가르침을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베버 등의 견해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구체적 사실에 입각해 볼 때 칼뱅주의가 자본가집단을 유인했다는 베버 등의 이론에는 과장된 바가 없지 않지만 그 실천과 사회적 습관이 훗날 자본주의의 생활 윤리를 고무한 면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절약과 근면, 절제에 입각한 경제적 성공이 신의 호의의 명백한 증거라는 교의는 광범위한 호응을 얻은 것입니다.
한편 칼뱅은 교회가 국가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신정정치를 지향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 절대주의체제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5)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권의 강화와 자본주의의 성장을 반영하는 예입니다. 절대주의 체제를 굳히고자 했던 영국 튜더(Tudor) 왕실의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한 에스파냐의 황녀 캐더린과 이혼하고 당시 임신 중이던 궁녀인 앤 보울린과 결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에스파냐 국왕 칼 5세와 가까웠던 교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헨리는 영국교회를 로마로부터 분리시키고, 스스로 그 수장임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왕권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로 영국 전역에 광범위한 토지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중산층의 지지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교회는 단지 로마로부터 분리되었을 뿐, 교리와 의식에서는 카톨릭에 가장 접근해 있습니다. 국교회의 성립은 또한 구래의 구교도와 보다 철저한 개혁을 추구한 청교도라는 소수집단을 산출해 내기도 했습니다.



 

(6) 반동종교개혁

 

종교개혁의 파문이 전 유럽에 확산되자 카톨릭교회도 교황청과 공의회를 중심으로 스스로 반성과 개혁에 나섰습니다. 이단사상으로부터 카톨릭교리를 지킨 종교 재판소, 군사조직으로써 아시아 및 아메리카 등지에서 카톨릭교세의 방어와 확장에 힘쓴 예수회, 성경과 전승에 기반한 그리스도적 진리 및 신앙과 선행에 의거한 구원관을 정비한 트렌트공의회(1545-1563), 또한 성직임명 및 교회재판의 공정성을 기한 교황청 등의 구체적 시도로써 카톨릭교회는 남동부유럽과 아시아 및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세력이 회복되자 신구교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됐습니다. 여기에 정치적 갈등 및 경제적 대립이 뒤얽혀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위그노전쟁,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거쳐, 17세기 초에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대규모국제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일례로 16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와 카톨릭의 양 집단은 발로와 왕실의 약체를 이용하여 왕권에 압박을 가하면서 경쟁하였고, 당시의 모후이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양 집단의 분쟁을 이용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수만명의 위그노를 살상했으며, 이어서 파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을 통하여 가톨릭교도와 위그노의 상호살육극이 벌어졌던 성 바르톨로뮤(St. Bartholomew)의 대학살(1572)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7) 종교개혁의 의의

 

루터의 개혁 이후 유럽은 100년 이상에 걸친 종교분쟁과 내란을 겪고 1648년에야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 후 카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한 교파들을 통틀어 개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요. 이들을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개신교가 카톨릭에 비하여 더 심화되고 내면화된 신앙심에 입각해 있다거나 혹은 개신교의 모든 교파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 발전에 긍정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교황의 정신적 권위가 부정되면서 카톨릭 교회에 의해 독점적으로 오던 기독교의 교리와 의식이 보다 자발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전유될 수 있음을 시사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성경과 신앙의 우위가 확립되어 개인의 내면적 신앙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오랜 종교분쟁에 지친 결과이기도 하지만 종교적 관용이 보다 증대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중세기독교세계의 통일이 와해됨으로써 보다 순조롭게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는 데 있습니다. 봉건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사회계층의 욕구, 교황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적 자각이 어느 정도는 실현되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겠지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간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런 중세적 종합 안에 묶여 있던 두 힘 중 그리스 정신이 자신의 고유성을 찾고자 분열하였고, 종교개혁에 이르러서는 그런 두 힘 중 기독교 정신이 자신의 본래성을 찾고자 재차 분열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쇄술의 확산과 함께 종교개혁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성과 비판정신이 증진되고 세속화되어 가는 경향을 저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서술들은 인간과 신과의 관계보다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인간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보다 더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정치사상의 발전은 종교개혁의 또 하나의 성과였습니다. 종교분쟁은 세속의 통치자들을 교회의개입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광범위한 사회대중을 동원하면서 다양한 정치적인 사유를 촉진했습니다. 이후 근대 정치적 사유의 흐름을 주도한 주권론과 자연법 사상은 주권의 문제를 사회의 주요세력이었던 귀족과 부르주아의 입장을 중심으로 검토하면서 절대주의체제에 대한 옹호 혹은 비판의 입장을 개진하게 됩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민중문화의 개혁운동도 전개되었습니다. 이를 주도했던 것은 성직자들이었습니다. 16세기까지 카톨릭 교회는 상당한 정도로 민중의 자치를 허용했으며, 민중은 집단적 신앙행위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관대함, 자발성, 무질서 등 이교적이고 분방했던 민중의 전통적인 문화 및 윤리 체계와 상반되는 예의, 근면, 엄숙, 정숙, 순종, 검약, 이성, 자제 등의 새로운 윤리가 주입되었으며 유럽 각 국가에서 성행했던 마녀사냥은 그 폭력적인 상황을 반영해줍니다. 결과적으로 민중신앙의 자율성이 크게 감소되었으며, 민중문화의 지형 역시 통치자의 종교적 결정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또한 기존의 가족, 친족 및 향촌적인 유대가 폐지되고 국가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한 위계질서가 자리잡혀 갔습니다.

 

종교개혁은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파열과 파행의 과정을 통하여 17세기의 합리주의와 18세기의 계몽주의로 가는 길을 예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http://cafe.daum.net/hayashi1/4ZFp/59